나는 제주에서
우울증 상담을 하는 사람입니다
괜찮은 척이 익숙해진 사람에게
나는 제주에서 우울증 상담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처음 들으면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짓습니다. 약간의 긴장, 그리고 곧이어 오는 안도. "아, 그럼 나도 가도 되는 건가" 싶은 얼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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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만나는 유형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요.
출근도 잘 합니다. 웃기도 잘 웃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는 항상 밝아서 좋겠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압니다. 이 밝음이 얼마나 애써서 유지되고 있는지를요.
이런 분들이 상담실에 오시면 제일 먼저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우울증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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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척은, 어느 순간부터 진짜 재능이 됩니다.
어릴 때부터 힘들다는 말을 하면 상황이 더 나빠지는 걸 봐온 사람일수록 이 재능이 발달합니다. 부모가 힘들어하니까, 내가 힘들다고 하면 짐이 되니까, 그냥 참는 쪽을 택합니다. 이 선택을 수백 번 반복하면, 나중에는 참고 있다는 감각조차 사라집니다. 그냥 그게 나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우울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습니다. 대신 이유 없이 눈물이 나거나,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조금씩 늘어나는 방식으로, 서서히 존재를 드러냅니다. 본인도 "왜 이러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도, 딱히 큰일도 없는데 힘들다고 말하기가 민망해서 계속 미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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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상담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진단을 내리는 게 아닙니다. "이 정도로 와도 되는 거였다"는 감각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큰일이 있어야만 힘들 자격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괜찮은 척을 오래 해온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힘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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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직장 내 괴롭힘, 딩크 이후의 감정, 경계성 성격장애까지 — 제가 상담실에서 만나는 우울의 얼굴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들 이 말을 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것.
"저 사실, 괜찮지 않았어요."
이 한 문장을 상담실 밖에서 꺼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상담실이라는 공간이 필요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글은 실제 상담 사례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 우울증 상담을 하며 반복적으로 마주한 장면들을 재구성한 기록입니다. 특정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담고 있지 않으며, 이 글은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위급한 상황이라면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1577-0199) 등 전문기관에 즉시 연락해 주세요.